티스토리 뷰
지필평가 마지막날이었다. 일찍 조퇴하고 집에 와서 컵라면에 김밥을 먹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있고, 잠시 책이나 좀 읽다가 오늘은 좀 일찍 데려와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펼친 책이었다. 책을 빌려 준 선생님에게 좀 슬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첫 편부터 이럴 줄이야.
입동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18쪽)
우리 부부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형 의자에, 영우는 유아용 접이식 식탁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20쪽)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김이라는 성씨와 그리고 '이응' 밖에 아직 써놓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돌 즈음 엄마 생일에 박수를 쳐주었던 아이, 옆에 있다면 이름을 썼다고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텐데, 아니면 마저 이렇게 저렇게 써야한다며 가르쳐주었을텐데. 그리고 아무데나 낙서를 하면 안 된다고 속으론 대견하면서도 혼냈을텐데. 제이름 석자를 이제 막 쓸 수 있게 된, 그 석자 하나 아직 채 다 쓰지 못한 그런 어린 아이인 것을. 가슴이 아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35쪽)
벽에 튄 복분자 얼룩이야 도배하면 그만이겠지만, 부모 가슴에 든 멍은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치 벌서듯 도배지를 들고 선 '나'. 도배를 마무리하고, 빚을 갚고, 이사를 가고 이럭저럭 살아나가도 그의 남은 생과 삶이란 것은 어쩌면 그에겐 벌서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입동(入冬). 겨울의 시작. 자정이 다 된 시간, 11월의 추운 밤에. 핏빛 복분자 얼룩이 아직 남은 벽과 마저 붙이지 못한 도배지 한 장. 앞으로 이 부부가 살아갈 인생의 길이 얼마나 가슴 시리고 헛헛할 것인지 짐작이 가는 제목이다. 복분자 얼룩이 벽에 튄 에피소드 또한 그 강렬한 색깔 때문에 이들의 마음에 남긴 선명한 상처를 독자에게 더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유용하게 기능하는 것 같다. 조금 힘이 들기도, 때로는 지루하기도 한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간절한 행복이고 감사인지를 이 단편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도 가슴을 때리며 읽었고, 김애란의 '입동'도 눈물을 쏟았다. 웬만해선 섬세하게 감정 표현을 다 하지 않는 남편도 이 단편 얘기를 듣더니 순간 닭살이 쫙- 돋았다고 했다. 내가, 우리가, 정말 아이를 키우고 있긴 하구나 싶었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0) | 2017.07.18 |
|---|---|
| 김애란, '바깥은 여름' (0) | 2017.07.17 |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1) | 2017.06.30 |
| 김애란, '비행운' (1) | 2017.06.29 |
| 김영하, '오직 두 사람' (2) | 2017.06.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