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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책.

 

내가 건축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고개를 더 끄덕이면서 재밌게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학문적인 내용으로만 가득찬 것은 아니지만 배경지식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넘겨가며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아니었다면, 마냥저냥 천천히 읽고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반납연기를 한번 하긴 했다.)

 

건축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닌 현실이라는,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슌스케 선생의 말이 무척 인상깊었다. 여름 별장 곳곳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섬세해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나도 그 별장에 한번쯤 갔다 와 본 것처럼 그 모습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고 상상이 되었다. 여름 별장도 무라이 사무소도 선생이 쓰러진 뒤 선생과 마찬가지로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나'가 있기에 다시 여름 별장은 숨결을 되찾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인물들의 긴장감 있는 관계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 밑줄 긋기

 

나는 나한테 배정된 이층 서고에 짐을 갖다놓고는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되어보았다. 나무 바닥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 여름 내내 맨발로 보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을 열자, 눈앞에 커다란 계수나무가 보였다. 늦게 온 치프 격인 가와라자키 씨 차가 계수나무 밑을 빙 돌아서 주차하는 참이었다.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간다. (27쪽)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차제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키코는 선생님한테도 각각의 사원들한테도 신뢰받았다. 온화하고 정확한 일처리가 그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유키코를 눈으로 좇지 않았다. 다만 귀는 유키코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62쪽)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63쪽)

 

왜 사람은 잡초만 깎아도 이렇게 상쾌해지는 걸까. 울퉁불퉁한 땅보다 편편하게 고른 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마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평평한 면을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인간이 처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웅덩이. (161쪽)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건축이 잘됐다는 이야기야." (중략)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180쪽)

 

"혼자서 읽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180쪽)

 

“본인이 삼가서 잠자코 있는 것하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한테는 똑같아요. 나는 꽃에도 열심히 말을 걸어요. 아무 말 안 하고 돌볼 때보다 훨씬 더 예쁜 꽃을 피워주니까. 정말이에요.” 후지사와 씨가 방긋 웃었다. (267쪽)

 

 

 

이제 여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날 책이름이 되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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