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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계속 축구하고 글 쓰고 축구 보고 글 읽으며 살고 싶다’는 작지만 조금 특별한(?) 소망을 가진 에세이스트 김혼비의 여자 축구 이야기이다. 축구는커녕 스포츠라는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나인데. 읽는 내내 눈앞에 축구장과 축구 경기를 떠올리면서 (내게는) 생소한 축구 경기의 룰이나 각종 기술적인 용어들을 열심히도 곱씹으며 읽었다.

저자는 학교 운동장의 90%는 남자들의 축구 경기로 내어주고, 고작 10%도 안 되는 공간에서 여자들은 발야구나 피구를 하는 현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나로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실 여중-여고-여대를 나왔으니, 학교 운동장은 축제 때나 바글바글하지, 체육 시간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운동장에서 돌 골라내고, 잡초 뽑고 아니면 교실에서 자습이나 하거나 그랬던 기억밖엔. 축구와 관련된 경험은 교직에 들어와서야 친밀했던 남학생 몇몇이 부탁해서 축구부 동아리 지도교사를 맡았던 것 정도였다.(아, 그해 임신도 해서 무거운 배를 안고 주말에 경기 쫓아다니며 물 심부름도 했네ㅋㅋ)

단지 축구를 좋아해서, 그래서 이젠 직접 해보고 싶어서 팀에 들어갔을 따름이라지만, 축구를 위해 몸을 만들고 체력을 단련하고, 팀원 ‘언니들’과 좌충우돌 연대하는 과정은 정말 열정 그 자체였다. 단지 좋아서 할 뿐이라는 그 순수한 열망들이 모여서 잘하든 못하든 아마추어 팀을 이루어 땀을 흘리는 ‘언니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게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긴 무언가를 푹 빠져 사랑하고, 열정을 바쳐 노력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지금도 어딘가에서 ‘기울어진 축구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270쪽)’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상하리만치 독자의 가슴을 뛰게 한다. 마구마구 응원하고 싶다. 다치지 말고, 우아하고 호쾌하게 계속할 수 있기를!


발야구나 피구라니, 생각할수록 참으로 애매한 운동 아닌가. 단지 올림픽 공식 종목에 포함되지 않는 스포츠라서가 아니라 게임 방식이나 룰을 따져 봐도 그렇다. 축구가 바둑이라면 발야구는 오목 정도의 느낌이고 피구는 알까기 정도? 공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중 던져서 사람 맞춰 내보내기라니, 바둑알 튕겨 맞춰 내보내는 알까기의 정신과 다를 게 뭔가. (31쪽)

그날 이후 회사나 일상에서 맨스플레인하려 드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주장의 슛이 떠올랐다. 살면서 본 가장 의미심장한 슛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명확했다.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느리고 우아하고 통쾌했던, 잊지 못할 로빙슛! 러빙슛! (60쪽)

별 소릴 다 듣겠다는 투로 말을 건넸지만, 그럴 때마다 미안함이 고마움으로 바뀌며 더 미안해졌다. 미안한 감정에 익숙해지는 것과 미안할 일이 줄어드는 것 중 뭐가 더 먼저일까. (123쪽)

다들 정말 못 말리겠다. 아마추어 여자 축구가 있는지 없는지, 여자들이 축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전혀 관심 없는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축구를 시작하고, 축구를 시작하게 끌어 주고, 축구를 하다가 다치고, 힘겹게 재활하고, 그래 놓고 또 기어들어 오고, 축구를 못 해서 병이 나고, 축구를 공부하다 못해 심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축구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매일매일 연습을 한다. (247쪽)

일 나가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어떻게든 일상에 축구를 밀어 넣는 이 여정 자체가 어떻게든 골대 안으로 골을 밀어 넣어야 하는 하나의 축구 경기다. 기울어진 축구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걸 잘 알기에 모두들 최대한 모두의 일상에 축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패스를 몰아주고 공간을 터 주고 리듬을 맞춰 준다. 여기서 우리는 한 팀이다. (270쪽)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개인적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맞섰을 뿐인데, 체육 대회에 나가지 못해 속상해서 항의했을 뿐인데, 그냥 보이는 대로 엄마를 그려 갔을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욕망을 억눌러서 생겨나는 이런 작은 ‘뿐’들이 모여 운동이 되고 파도처럼 밀려가며 선을 조금씩 지워 갈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축구하는 여자들이 한 팀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 원래 운동은 머릿수가 많을수록 힘이 붙는 법이니까.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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