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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일(26쪽)  

 

내가 매일 몇 번을 손바닥으로 차근하게 만지는 배와 옆구리

생활은 그처럼 만져진다

 

구름이며 둥지이며 보조개이며 빵이며 고깃덩어리이며 악몽이며 무덤인

 

나는 야채를 사러 간다

나는 목욕탕에 간다

나는 자전거를 타러 간다

나는 장례식장에 간다

 

오전엔 장바구니 속 얌전한 감자들처럼

목용탕에선 열탕과 냉탕을 오가며

오후엔 석양 쪽으로 바퀴를 굴리며

밤의 눈물을 뭉쳐놓고서

 

그리고 목이 긴 양말을 벗으며

선풍기를 회전시키며

모래밭처럼 탄식한다

 

 

 

# 호수(33쪽)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 여름날의 마지막 바닷가(35쪽)

 

바닷가는 밀려와 춤추는 파도들로 흥겨워요

 

나는 모래밭에 당신의 이름과 나의 질문을 묻었어요

나는 모래성을 하나 더 쌓아놓고 바닷새보다 멀리서 올라올 밀물을 기다려요

 

모래알에는 보리처럼 뿌린 별이 가득한데

모래알에는 초승의 달빛이 일렁이는데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36쪽)

 

너는 내게 이따금 묻네

너와 나의 관계를

그것은 참 어려운 질문

 

그러면 나는 대답하네

나란히 걸어가면서

 

나는 너의 뒷모습

나는 네가 키운 밀 싹

너의 바닷가에 핀 해당화

 

어서 와서 앉으렴

너는 나의 기분 위에 앉은 유쾌한 새

 

나는 너의 씨앗 속에

나는 너의 화단 속에

 

나는 너를 보면

너의 얼굴만 떠올리면

산나무 열매를 본 산새처럼 좋아라

 

그러면 너는 웃네

분수 같은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 염소야(41쪽)

 

염소야, 네가 시름시름 앓을 때 아버지는 따뜻한 재로 너를 덮어주셨지

나는 네 몸을 덮은 재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너의 곁을 지켰지

염소야, 새로 돋은 풀잎들은 이처럼 활달한데

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이 봄을 다 덮을 듯한데

염소야, 잊지 않고 해마다 가꾼 풀밭을 너에게 다 줄게!

네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 가을(42쪽)

 

엄마는 나한테 가랑잎 같은 잔소리를 해요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쪼그만 가랑잎이 되어요

엄마 무릎 아래

잠이 올 때까지 가랑잎처럼 뒹굴어요

 

 

 

 

# 그 위에(52쪽)

 

설레는 물

물의 뿌리에서 자란

새순

위에

푸릇한 꿈

나의 잠

나의 머리 위에

나무

식물원에서 본 종려나무

모든 나무에겐 새가 앉고

새의 울음 위에

조금은 여린 햇살

그 위에

충분한 하늘

그리고

관대한 봄

 

 

 

 

#  일일일야(一日一夜)

 

꽃나무는 꽃나무가 그린 화첩을 펼친다

사람들은 하얀 접시에 봄의 급식을 받는다

누구라도 초조하지 않고

누구라도 딸기처럼 안색이 좋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가는 공원은 평년 기온을 즐긴다

탄력 있는 덤불 옆에 탄력 있는 덤불이 있고

사람들은 꽃나무 아래서 서로의 콩트를 읽는다

나른하게 낮잠을 즐긴다

낮잠 위로는 또 꽃잎이 날려 꿈을 얇게 덮는다

오, 우리가 이처럼 잠잘 때

우리의 봄꿈은 밤까지 그리고 다시 낮까지

꼬박 하루만 이어졌으면

 

 

 

 

# 매일의 독백(81쪽)

 

나를 꺼내줘 단호한 틀과 상자로부터 탁상시계로부터 굳어버린 과거로부터 검은 관에서 끄집어내줘 신분증과 옷으로부터

 

흐르는 물속에 암자의 풍경 소리 속에 밤의 달무리 속에 자라는 식물 속에 그날그날의 구름 속에 저 가랑비와 실바람 속에 당신의 감탄사 속에 넣어줘

 

나를 다음 생(生)에 놓아줘 서른세 개의 하늘에 풀어놓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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