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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에 손을 얹는 법은 단순한 듯 어려웠다. 손에 힘을 풀고 뭔가 부드럽게 감아쥐는 모양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힘을 주지 않고도 뭔가를 움켜쥘 수 있다는 게, 또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9쪽, '도도한 생활')
그렇게 도를 찾아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를 다시 치는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덩치 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 도ㅡ의 울림을 좋아했다. 다행히 도를 찾고 나면 레를 짚기가 수월했다. 레는 도 바로 옆에 있었다. 미는 레 옆이고, 파는 미 다음이니까, 일단 도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10쪽, '도도한 생활')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불을 이고 집을 떠나온 이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작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ㅡ 도ㅡ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19쪽, '도도한 생활')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33쪽, '도도한 생활')
그녀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 좋은 순간은 뭔가 같이 '먹을 때'라는 걸 깨달았다. 밥상 앞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보통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그 상이 그냥 상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밥상처럼 느껴졌다. (65쪽, '침이 고인다')
K-59. 오래전 내 책상 번호. 1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 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가 내겐 어떤 떳떳한 한 시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만큼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때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ㅡ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147쪽,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151쪽, '칼자국')
사내는 자기 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빙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 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158쪽, '칼자국')
집에 오자, 부엌의 어둑한 어떤 것이 움직여 나를 타이르는 듯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아파도 괜찮고, 느껴도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이제 크게 울고 자도 된다고. 마음이 아픈 건 아니었다. 심장이, 콩팥이, 그리고 창자가 아렸다. 심한 갈증이 났다. (178쪽, '칼자국')
신림ㅡ 하면 푸른 숲이 떠오른다. 나무가 많은 숲 그리고 젊은 숲. 그 숲의 나무들은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표시하는 연녹색을 띠고 있다. 보통의 나뭇잎은 그보다 짙지만 어쩐지 신림의 나무들만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신림, 하고 소리 내면, 먼 곳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수풀림, 수풀 림' 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읊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183쪽, '기도')
그러고 보니 문득 펑ㅡ 이라는 말은 뻥ㅡ 이라는 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기분 좋은 소리 안에는 발마이 들어 있다. 바람 '풍(風)'자의 날렵한 꼬리 안에 매달린 어머니의 말들이, 낱말의 풀씨들이, 골목 같은 내 핏속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툭ㅡ 하고 발아하는 소리처럼. 내 입속말들이 세계를 떠돌다 당신 안에 들어가 또 다른 말을 틔우는 소리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ㅡ 사라진 말과 사라진 기억, 끝끝내 알 수 없거나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장면,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같이 느껴지는 풍경과 함께, 무언가 실종된 것들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먹고 자란 것은 아니었을까. (220쪽, '네모난 자리들')
우리가 하는 말은 대부분 할 말이 없어서이거나 침묵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는 우리가 언제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쉽게 잊어버리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 말들 안에서 자주 달뜨고, 아프고, 우왕좌왕했다. (222쪽, '네모난 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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