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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가 알고 있던, 그 '랄프 로렌'에 대한 이야기일 줄은 모르고 책을 펼쳤다. 프롤로그를 읽으면서는 적지않게 실망했다. 그에 대해서 나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랄프 로렌의 옷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읽어야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그런 것들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생은 길다'고 기쿠 박사는 말했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진실하게 내비치고 표현하기에 인생은 어쩌면 터무니 없이 짧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종수'는 '수영'을 위해, 그리고 '수영'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위해 순전히 호의로 한 어떤 말이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서야 그 말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랄프 로렌'의 여정을 세세하게, 어쩌면 지나치게 꼼꼼할 정도로 좇게 되었다. 그 자신도 때로는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간 낭비를 하는 것마저도 그시절의 그에겐 최선이었을 것이다.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351쪽)
'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기어코 우겨서 편지에 '디어 랄프 로렌'이라고 썼다. 생각해보면 '종수'에게 보낸 청접장에서도 그녀는 '디어 종수'라고 썼다. 견고하고 평탄했던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던) '종수'의 삶에 균열이 생긴 어떤 순간에 그녀의 청첩장, 지아 류의 노크, 잭슨 여사와의 대화, 섀넌과의 만남이 '다정하게' 찾아와주어 다행이다. 무신경하게 뱉은 나의 말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기를, 나 자신이 좋은, 괜찮은 사람임을 남도, 나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나이기를 소망해본다.
* 밑줄 긋기
그리고 문득,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아 류가 떠올랐다. 그는 앞으로도 내 집 문을 두드릴까? 그가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 하더라도 이제 거기엔 내가 '없다'. 이제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내가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81쪽)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어떤 말이 가장 적절할지 알 수 없었다. 섀넌 헤이스가 내 등을 두드렸다. 잭슨 여사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그게 노크 소리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가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봐요, 살아 있어요?'라고 물어봐주는 목소리. 물론 그건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 그게 착각이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될지라도, 잠시라도 그런 생각에 빠져들 수 있었다는 건, 내게 주어진 큰 행운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퐁옹한 채로 아주 오랫동안 거기 남아 있었다. (337쪽)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예쁜 표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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