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기묘하다.
부조화
비틀림.
불안
몽상
유머
죄책감
.
.
.
단편 하나 씩 읽어나가면서 머릿속에 스쳤던 단어들.
* 밑줄 긋기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42쪽, '너무 한낮의 연애')
재작년인가 엄마는 더이상 이모부에게 편지하지 말라고 했다. 멀리 떠났다면서. 그래도 편지를 계속 썼다. 무슨 일을 주기적으로 하는 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급식시간에는 늘 선글라스를 낀다. 수업시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엎드렸다 일어났다 한다. 엄마도 주기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지금보다는 덜 불행했을 텐데. 수입은 일정한 주기로 들어와야 한다. 부모는 일정 시간 집에 머물러야 한다. 삶에는 파도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밀려나가야 한다. (106쪽, '반월')
한강을 지나는 다리 조명이 소등시간에 맞춰 꺼졌고 그녀는 정말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그녀의 시야를 가리던 옥수수밭으로부터 멀지 않은 세계, 아주 낯익고 피해 갈 수 없는 어떤 치명적인 상처를 지닌 세계였다. 꺼져가는 세계였고 죽어가는 세계였다. (202쪽, '우리가 어느 별에서')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저 저렇게 한없이 벗겨저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37쪽, '너무 한낮의 연애')
세상에는 욕망에 들려 뚜렷한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며 시간을 축적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 순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는 의지로 시간을 흐트러뜨리는 삶의 방식도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양희가 그의 시선을 나무로 향하게 돌려놓을 떄 그것은 시선을 외면하려던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이해에 닿아 있던 나무처럼 다정한 무심함으로 자신을 바라보려는 안간힘이었음을 깨닫는다. 세상 어떤 것도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다. 사라져버렸다고 믿었던 세계는 이렇게 돌아와 무심하게 충만함에 도달한다. 그렇게 김금희는 현재에 도착한 세계를 믿는다. 그리고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세계를 바꾸려는 싸움도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자리들,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성의 자리들을 응시하는 김금희의 소설에는 잔존의 파토스가 있다. (283쪽, 문학평론가 강지희 해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문재인, '문재인의 운명' (1) | 2017.06.21 |
|---|---|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2) | 2017.06.20 |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1) | 2017.06.15 |
| 한강, '희랍어 시간' (1) | 2017.06.09 |
| 최은영, '쇼코의 미소' (0) | 2017.05.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