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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은 <채식주의자>에서 제일 처음 접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 내용 전개가 꽤 흡입력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가다가 작가의 섬세한 감정 묘사들 때문에 사람들이 대개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수준과는 조금 다른 인물의 심정에 어느새 빠져 젖어들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친한 선생님이 추천해 빌려 준 <희랍어 시간>이다. 눈이 멀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되어 아주 천천히 전개되다가 마침내 합일(合一)을 이루고 마침표를 찍었다.
눈이 먼다는 것, 말을 잃는다는 것. 사실 두 가지 모두 경험하지 않은 것이며,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잃음'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희랍어라는 고어(古語)를 통해 각자가 경험하고 나누게 된 의미 있는 사유의 세계가 때로는 어렵게 다가오기도 했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슬픔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한강의 소설을 더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밑줄 긋기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14쪽)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36쪽)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43쪽)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80쪽)
고백하자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110쪽)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117쪽)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161쪽)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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